가을여행 ‘한국관광 100선’ 세 번의 시간여행
등록 2018.10.05
찬란했던 신라의 정취에 세간의 시름을 덜고, 고려 때 누각에 올라 잊고 있던 풍류를 즐긴다. 아픈 역사가 깃든 조선의 읍성에서는 평화의 소중함을 마음 깊이 되새겨 본다.
※‘한국관광 100선’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7~2018 한국인이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을 소개합니다.
2017~2018 한국관광 100
화려하고 낭만적인 신라의 달밤, 경주 동궁과 월지&첨성대
경주는 그윽한 야경을 즐기기 좋은 도시다. 해가 지면 대릉원 고분이 달빛 아래 부드러운 곡선을 드러내고 동궁과 월지, 첨성대는 야간 조명을 받아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하이라이트는 월성 지구다. 월성 지구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경주 역사유적 지구’ 5곳 중 한 곳으로 신라 궁궐이 있던 월성,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내물왕릉, 첨성대, 동궁과 월지까지 아우른다.
대릉원 고분
동궁과 월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안압지의 정식 명칭이다. 동궁은 태자가 살던 신라 왕궁의 별궁이고, 월지는 동궁 안 연못이다.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은 신라가 멸망한 뒤 폐허가 된 별궁과 연못에 오리와 기러기만 유유히 날아다닌다고 해서 붙여졌다. 그동안 안압지 혹은 임해전지로 불리다가 2011년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바뀌었고, 연못과 건물 3채가 복원됐다. 연못은 동서 200m, 남북 180m, 둘레 1000m로 아담하지만 가장자리에 굴곡이 많아 어디에서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첨성대 야경
동궁과 월지에서 첨성대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다. 첨성대는 야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명소답게 밤에도 관람객이 몰린다.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왕궁 앞에 세운 천문대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됐다. 높이 약 9m로, 현존하는 2~3m 높이의 고려와 조선 천문대에 비하면 훨씬 크다. 중간쯤에 난 창문 아래 안쪽을 막돌로 채우고 기초공사를 탄탄히 한 덕에 140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왔다.
[왼쪽/오른쪽]한복을 입은 관광객 / 경주 계림길
촉석루 난간에 기대어 남강을 굽어보다. 진주성
진주성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 격전장이었다. 왜군과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에서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순국한 가슴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이때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충절을 다한 곳으로 유명하다. 진주성 안에는 촉석루와 의암, 김시민 장군 전공비, 의기사, 국립진주박물관 등 여러 문화재와 시설이 있다.
진주성
영남 제일의 누각으로 꼽히는 촉석루는 1241년(고려 고종 28년)에 창건됐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주성을 방어하는 지휘본부로 쓰였다.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0년에 복원했다. 미국 CNN 방송이 한국 방문 시 꼭 가보아야 할 곳 50선에 선정하기도 했다. 촉석루 아래로 내려가면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몸을 던진 ‘의암’을 볼 수 있다. 논개의 넋을 기리는 사당 ‘의기사’는 1740년에 건립됐다.
[왼쪽/오른쪽]진주성 성곽길 / 의암
촉석루와 의암을 둘러본 뒤 국립진주박물관도 찾아보자. 박물관 건물은 ‘공간 사옥’ ‘올림픽주경기장’ ‘경동교회’를 설계한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고(故) 김수근 선생 작품이다. 지하1층, 지상2층 규모의 나지막한 건물은 진주성 전체 경관 속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녹아든다. 사람과 주변 환경에 대한 배려를 건축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던 건축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겼다. 1984년 개관할 당시에는 선사와 가야 유물을 주로 전시했으나 1998년 임진왜란을 주제로 한 역사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국립진주박물관의 전시물
구한말 천주교 박해의 아픈 역사가 깃든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낙안읍성, 고창읍성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읍성이다. 읍성이란 산성과 달리 평지의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성을 말한다. 둘레 1.8km, 높이 5m에 이르는 해미읍성은 현재 국내에 남은 읍성 가운데 원형이 잘 보존된 곳으로 꼽힌다.
해미읍성 성곽
왜적을 막기 위해 1417년(태종 17년)부터 1421년(세종 3년)까지 쌓았고, 완전한 규모는 1491년(성종 22년)에 갖췄다. 조선 초기에는 충청병마절도사가 근무한 영(사령부)도 설치됐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선조 때인 1579년 이곳에 훈련원 교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가량 근무했다. 동·남·서쪽에 각각 문루가 있는데 남문을 제외하고는 1974년 다시 세웠다. 해미읍성은 100년 가까이 계속된 천주교 박해의 현장을 지켜본 역사의 산실이기도 하다. 읍성 안 감옥터에 천주교 신자들의 손발과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하던 회화나무가 남아 역사를 증언한다.
해미읍성
읍성 인근에는 충청 지역 무명 순교자를 기리는 해미순교성지(여숫골)가 있다. 고종 때인 1866년(병인박해)에서 1882년 사이에 이뤄진 천주교 박해 때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을 당한 곳이다. 읍성 서문 밖 돌다리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처형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했다고 전한다. 1985년 해미 본당 설립 이후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순례지가 됐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찾았을 때 방문하기도 했다.
해미순교성지
여행정보
출처 : 청사초롱
글 : 이정화(여행작가)
사진 : 박은경, 한국관광공사DB,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
※ 위 정보는 2018년 9월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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